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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사귄 친구

그림자가 없는 친구의 부모, 아이를 잃고 의욕 없이 살아가던 일 층 집주인 부부를 본 '나'. 잠결에 들은 그 시끄러운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늘 조용히 지내야 한다고 엄마가 말했는데, 없는 듯이 지내라고 했는데, 왜...?

Thu Jul 11 00:00:00 KST 2019

이사 온 집의 초록색 철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게 친구가 생길 거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았다.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이의 등이, 보였으니까. 아이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고 얼굴의 절반이 이지러져 피투성이였지만, 나도 뭐 계단에서 굴러 머리가 깨진 적도 있고, 방방을 타다 손가락이 부러진 적도 있으니 그건 딱히 놀랍진 않았다. 다만 뭔가 이상하다, 하고 오 초가량 생각하다 그림자가 없잖아,라고 깨닫곤 흡, 하고 곧 잊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물어 버렸다. 너무 궁금했으니까. 아이는 어깨를 으쓱, 하고 어른 흉내를 내더니 대답했다. 자전거 타고 놀러 나갔다가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봉고차에 치였어. 그대로 끝이었지, 뭐. 생각할 틈도 없었어. 봉고차는 그대로 달아났는데, 차 번호도 모른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했다.
그 자전거가 아직도 담장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엄마가 핏물은 닦아 냈어,라고 아이가 말했지만, 바퀴의 바람은 빠져 흐물거렸고 안장에는 흙먼지가 내려앉아 희부연 빛을 띠었다. 저거 좀 치우라고 말하고 싶어, 저거 때문에 내가 아직도 이 집을 못 벗어난단 말이야.

 

 

엄마는 이사를 올 때부터, 나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수민아, 그 집에선 조용히 지내야 해. 엄마가 부동산에서 들었는데, 일 층 주인집 애가 죽은 지 얼마 안 됐대. 수민이랑 동갑이었대. 그 엄마 아빠가, 수민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프겠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수민이는 힘들겠지만, 소리 지르지 말고, 살금살금 걷고, 얌전히 예쁘게 지내야 해…… 나는 엄마, 내가 언제 시끄럽게 지낸 적이 있어, 하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의 손이 내 이마를 어루만지고,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아이와 함께 읽었다. 나는 책을 꽤나 잘 읽었고 그게 엄마의 자랑이었다. 아이에게 ㄱ부터 읽어 주었는데 ㄴ에 ‘나팔꽃’이 있었다. 오, 여기 봐. 내가 아이를 불렀다. 나팔꽃이 피기 전날 밤에 종이 고깔을 씌워 놓고 아침에 고깔을 벗기면 꽃이 피어나는 걸 바로 볼 수 있대. 와 대박. 나 그런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나도, 나도. 우리 한번 해 보자. 나는 용돈을 들고 달려 나가 동네의 문방구에서 나팔꽃 씨와 적당히 두꺼운 도화지를 사 왔다. 일 층과 이 층의 중간 즈음에 있는 화단에 나팔꽃 씨를 심고, 집에 올라와서는 도화지를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희미하게 새벽꿈을 꾸는 사이로 뭔가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쿵쿵, 뚜욱 뚝, 그리고 고함 소리와 울음소리.
항상 조용하던 우리 집에서, 온갖 소리가 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눈을 떴다. 아이의 부모를 보았다.

그림자가 없는 친구의 부모, 아이를 잃고 의욕 없이 살아가던 일 층 집주인 부부를 본 '나'. 잠결에 들은 그 시끄러운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늘 조용히 지내야 한다고 엄마가 말했는데, 없는 듯이 지내라고 했는데, 왜...?